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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페미니스트와 동네산책 - 민해편
군포여성민우회 조회수:180
2021-08-18 15:41:22

 

 

 

회원과 함께~ 동네 한바퀴!

<페미니스트와 동네산책>은 매달 1회씩 릴레이로 연재됩니다.

 

8월의 주인공은 바로 대학 내 페미니즘 운동을 해왔고, 

올해 신입회원으로 민우회와 만나게 된 ▶민해◀

 

<민해님과의 산책은 의왕역 주변 왕송호수에서 이뤄졌다.

회사 숙소와 가까워 저녁 산책 겸 자주 오게 된다고~>

 

중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셨다고요.

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6년을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라는 곳에 살았어요. 동네에 한국인들이 꽤

있었지만 중국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한국인은 한 학년에 몇 명 정도였어요. 이 시기에 되게 배운 게 많아요. 제가 한국

사회에서 계속 자랐으면 어쩌면 소수자성에 대한 이해를 못 하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아요. 돌아보면 나름 엘리트 교육

을 받았거든요. 어린 시절 외국에서 공부를 했고, 유학 경험을 토대로 외국어고등학교에 갔고, 학벌사회에서 나쁘지 않

은 대학교를 졸업했어요. 근데 중국에서의 경험이 소수자로 생활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구체적으로 느끼는 시간이었

어요. 차별이 되게 많았어요. 똑같이 숙제를 안 했는데 우리 부모님만 학교 오라고 하고. 애들도 많이 놀리고. 당시에는

막연한 억울함이었는데 본능적으로 차별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를 했던 것 같아요.

근데 더 충격이었던 건 제가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예요. 그때 제가 한국말을 더듬었거든요. 중

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나에게 말 더듬는다고 고치라는 얘기를 안 했어요. 집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고쳐지려니 했겠죠.

근데 학교에 가니까 이것 때문에 엄청 놀림을 당하는 거예요. 나는 한국에 오면 더 이상 차별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외고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공부이외에 다른 것이 많이 제한되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그 안에서 고민이 있으셨던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됐어요. 그래서 야간자율학습이 10시까지 제한된다고 교육감이 발표를 했

는데, 저희 학교는 11시 반까지 계속하는 거예요. 저는 하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교장선생님한테 반대 이유서를 작성해

서 찾아갔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하게 얘기했던 건 “우리 학교 공립학교고, 선생님들 다 공무원인데

민주적 선거에 따라 선출된 교육감의 말을 부정하는 건 잘못된 거 아니냐 학생들이 뭘 배우겠냐” 이러니까 교장선생님

이 아차 하시더라고요. 고2 시작하자마자 약간 좀 그렇게 찍혔고, 학칙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제도 안에서 최대한의 자

유를 누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징계도 받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운동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이게 영화 같긴 한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광화문 교보문고를 갔다가 나오는 길에 반값 등록금 시위 현장을 본 거예요.

뭐하나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시위하던 분들이 갑자기 저쪽에서 막 달려오고 별안간 그분들과 저 있는 곳 앞뒤로 경찰

이 막은 거예요. 그래서 갇힌 상태로 그 시위대 분들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거죠. 그게 계기가 돼서 이후에 한진중

공업 희망버스로 이어졌고, 다니던 학원 옆에 쌍용자동차 농성장이 생기기도 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학교 가서도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근데 그 당시 어떤 선배가 대학교에서 여성주의 운동을 해보라는 거예요. 그걸 기

억하고 있다가 대학교 가서 ‘입도선매’당했죠. 입학도 하기 전에 이미 총여학생회 회의에 나가고 그랬어요.

 

<인터뷰 당일에는 비교적 업무시간이 유연한 날이어서

점심으로 떡튀김 야무진 세트까지 먹고 여유롭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활동했던 곳들을 직접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월담은 한양 반성폭력 반성차별 모임이고요. 저는 입학했던 2013년부터 활동했어요. 처음에는 한양대학교에

한정되었는데 지금은 한양여대와 에리카캠퍼스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2013년 총여였던

‘밀담’은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전년도 총여학생회가 사실상 여성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

았기 때문에 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밀담이 시도를 많이 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로는 강의평가에 성

차별, 혐오발언을 제보할 수 있는 항목을 넣은 거예요. 이게 2013년도 제가 신입생 때 처음 요구되고 실제

이루어진 거는 2017년인가 그래요. 당장 바뀌지는 않더라도 계속 목소리 내면 되는구나 그런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의미 있는 활동이었습니다. 2014년 ‘도담’은 여성주의 소모임 지원 사업들을 진행해서 자발적인 여

성주의 모임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했던 것이 큰 성과가 아닌가 해요.

 

인터뷰 오기 전에 <월담> 아카이브 페이지를 봤거든요. 말씀하셨던 강의평가에 차별발언 항목제안 운동도 있었고, 양

성평등센터를 성평등센터로 전환하는 것, 성폭력사건 지원, 장애인 이동권 문제, 외국인 대상 등록금 인상 반대 등 활동

이 굉장히 다양해서 인상 깊었어요.

제가 활동하던 당시에 월담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유연성이었던 것 같아요. 반성폭력, 반성차별 모임이라는 이름을 가

지고는 있지만 사실상 활동가가 저 혼자였기 때문에 성소수자 문제나, 장애인 이동권 문제 등에 연대하는 것에 유연했

어요. 생각 해보면 당시 저에게 월담은 힘들기도 했지만 하나의 놀이터였던 것 같아요. 학교 안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의 이야기들을 고발할 수 있는 창구였고, 한 명의 학생이 아니라 월담이라는 여성주의 소모임의 이름으로 목소리

낼 수 있다는 게. (대자보를 통해 꾸준히 입장문을 내셨잖아요. 이런 의제에 대한 고민들은 어떻게, 어디서 얻었나요?)

그건 제가 외국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외국인 특정해서 등록금 인상하는 문제가 들어왔던 거고, 저희 가족 중에 장애인

이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고, 그렇게 저한테는 되게 자연스러운 일들이었어요. 특별히 찾

은 건 아니라 그냥 보이는 거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내용이라는 게 저는 너무 좋은 거죠. 제가 생

각했던 것처럼 차별들이 서로 별개로 생각되지 않고, 다 잘못됐고 중첩된다는 걸 얘기하는 거니까. 차별금지법 꼭 제정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월담> 활동시기를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대학교 다니는 내내 되게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1,2학년 때는 그냥 선배들이 있으니까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주로

따라갔는데 3학년이 되니까 거짓말처럼 선배들이 다 졸업해버렸어요. 총여학생회는 활동가가 나오지 않아서 세워지지

않았고 월담이라는 여성주의 소모임 형태로 이어졌어요. 근데 그 월담에 활동가가 사실상 저밖에 없었어요. 총여가 했

던 일을 월담이 어느 정도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월담에 피해 호소를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당시 학내 양성평등 센터는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거든요. 이러다 보니 제가 그만두면 학내에 여성주의 모임 자

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청 컸어요. 그렇게 27개월을 사실상 1인 활동가로 모임을 이어갔어요.

당시 학내에 단톡방 성희롱을 포함해서 여러 성폭력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제가 매뉴얼을 만들었어요. 사실 굉장히

잘못될 수 있는 행동이거든요. 피해자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라 원하는 조치가 다 다를 텐데 ‘나는 이런 피해 호

소가 들어오면 이런 이런 대응을 해야겠다’이렇게 매뉴얼을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한거죠. 참 반성을 많이 해야 되는

거고 한편으로는 거기서 제가 결정을 했던 것 같아요. ‘아 나는 활동가로는 못 살겠구나 나의 역량은 딱 여기까지구나’

 

<민해님은 지금 건설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차분히 이전 활동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고민들을 쌓기 위해 9월부터는 무려 대학원생활을 병행한다고!>

 

학교 다니는 내내 성평등 활동을 했음에도, 어느 순간에는 활동이 지워지고 ‘남성’으로만 불리는 때가 있었을까요?

없진 않았죠. 기억에 남는 건 연대회의체 장소를 여대로 잡아요. 어떤 여대는 남성이 아예 못 들어가는 곳도 있는데, 아

무 생각 없이 회의 장소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월담에서 한 명 온다고만 생각하지 남성이라고 생각을 안한거죠. 그리

고 ‘이래서 남성은 안돼’ 이런 말도 종종 들었어요. 그럴 때는 그냥 외면했던 것 같아요. 그냥 내 일을 하면 되지 뭐. 저

는 그때 저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그 얘기 듣기 싫다고 그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속으로는 그 생각을 했

죠. 여성페미니스트활동가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라도 있는데 낫지 않나 (당사자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없다고 해서 안될 건 없지 않나? 어떻게 보면 운동은 확장

해나가는 거잖아요. 굳이 그거를 벽을 세워가면서 재단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이전 활동들을 정리하는 시기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지금 현재 시점에서 민해님에게 페미니즘은 어떻게

정의 내려지고 있나요?  

일상의 소소한 실천이에요. 제가 회사에 대자보를 써서 붙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실 안에 고착화되어 있

는 성역할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옳지 않은 발화나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이런 과정? 일상적인 실천인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는 문제적 상황에서 대자보를 붙이고 기자회견도 열고 그랬지만 지금은 일상적 실천을 통해서 기

여하려고 노력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회 현장에 함께 하긴 했지만 가장 밀도 높은 활동 시기는 대학교 때였던 거잖아요.

그 활동의 시기를 보내고 나서 나의 변화는?

그런 거 있잖아요. 맛있는 거 설명할 때 한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고 안 먹는 사람은 없다고 저는 그거

같아요. 운동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사회변화를 위해 뭔가 해본 사람은 계속 남아있는 것 같아요. 오늘도 빨대 아무 생

각 없이 사용할 수 있는데, 한 번씩 고민해보는 거죠. 그 이유는 역시 활동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그거를 없는 것처럼 취

급하기에는 너무 길고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해요.

제가 헤테로 남성이다 보니까 부모님은 취업하자 마자 결혼 언제 하냐는 얘기를 해요. 근데 그런 고민이 드는 거예요.

‘내가 과연 성평등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사람이 좋은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평등

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가가 결혼을 떠올릴 때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이런 조건 자체가 달라지는 거죠.

 

<인터뷰 전 미리 포토존까지 구상해주셔서(!) 바로 ‘오늘의 컷’이 나올 수 있었다ㅎㅎ>

 

군포여성민우회에 회원으로 함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모든 운동은 지역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중앙 단위에 있는 장애인 단체가 당장 제 집 앞에 있는

점자 블록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역량을 갖

추는 것이 일상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군포여성민우회를 특별히 생각하고 있어요.

 

군포여성민우회 회원 행사는 신입회원 세미나로 처음 오신 거잖아요. 좋았던 부분이 있다면^^

대학 다닐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진짜 몇 년 만이었고요. 아직 제안

에 불씨가 살아있구나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선배 활동가들의 이런저런 조언도 들을 수 있었고 궁금증

도 해결할 수 있었고

 

앞으로 군포여성민우회에서 하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듣기도 하고. 왜냐면 저는 대학교를 떠나서 페미니즘 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민우회의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여러 얘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