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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페미니스트와 동네산책 - 김동숙편
군포여성민우회 조회수:761
2021-06-10 17:04:58

<올해 들어 가장 더웠던 6월초, 철쭉공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빠르게 돌려

찾아 들어간 카페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어린시절은 어떠셨어요?

저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어요. 말괄량이였죠. 저희가 6남매예요. 첫째가 언니고, 4명의

오빠가 있어요. 제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여서 아주 아기였을 때는 이쁨을 많이 받았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살았거든요.

 

어렸을 적부터 일을 많이 했어요. 해남은 바닷가까지 끼여있어서 농사도 짓고, 김양식도 했거든요.

그래서 사계절 내내 바빴어요. 근데 오빠들은 도시를 왔다갔다 했고, 아버지는 생활능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그즈음 사업실패로 충격을 받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가 혼자 너무 힘드니까

어린 나를 붙잡고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엄마를 도와줬던 건 2학년부터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예요. 밭매기부터 김작업까지 다 했어요.

 

당시 하루일과는 어떻게 됐나요?

평소에는 5시 반에 기상해서 밥 먹고, 학교 갈 때는 가고, 돌아와서는 밥하고 일하고 그런 것을

일반적으로 했어요. 겨울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은데, 새벽 2시~4시 사이에 일어나야 했어요. 

그때부터 김을 만드는 거예요. 김을 갈아서 희석한 반죽을 엄마가 네모난 발에다가 탁! 떠주면 

제가 얇게 피는 작업을 했어요. 지금은 공장에서 다하지만 그때는 수동으로 했어요. 겨울에 너무

추우니까 10개 만들고, 불쬐고 그랬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부터는 당시 육성회비가 만원 정도였는데 그걸 내기 위해서 알바를 시작했어요. 

굴도 까서 팔고, 고동도 엄청나게 잡았어요. 나의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서 알바를 했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부모가 갈취해가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어요. 아버지가 당시 일을 못하다 보니까

제 돈을 가져가서 다 쓰셨죠. 그때 하루 일당이 2만 5천원이었으니까 보름 정도 일하면 벌써 25만

원이 넘는단 말이에요. 어른들 못지 않게 버는 거예요. 근데 한 푼도 저에게 돌아온 기억이 없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육성회비를 늦게 내면 때렸거든요. 저는 항상 제일 늦게 내서 맞았던 

기억이 있네요. 그때 내가 굴을 까서 팔고, 고동을 딴게 다 내 성과를 위해서였는데 내 성과는 

하나도 이루지 못했어요. 오빠가 대학을 다녔다 보니까 거기로 돈이 많이 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나요?

당시 생각에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하지 않나 해서 서울 야간 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겼어요. 등록금

첫번만 내달라고 부탁해서 언니가 내주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다 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사회

생활을 시작했어요. 근데 회사를 참 잘 만난 것 같아요. 그때 사장님이 우리 또래의 자녀가 있어서

그런지 저와 제 동료들을 잘 챙겨주셨어요. 관리자분들도 다 괜찮은 분들이었고, 회사가 중소기업

이었는데 되게 감사한 기억이에요.

 

학창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 시절이 제일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일은 했지만, 형제보다 부모보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더 많이 챙겨준다는 것을 알았어요. 지금도 부모나 형제보다 주위 사람들이 나한테 더 도움이

되더라 그렇게 생각해요. 학교 친구들, 동료들이랑 같이 놀고, 공부하고, 일하고 가끔 땡땡이도

치고 (웃음) 그러면서 고등학교 때 혼자 사춘기를 참 잘 보낸 것 같아요. 누구는 받아주는 이가

있어서 부모한테 생떼도 부리고 언니한테 대들고 한다지만 나는 한 번도 내 부모한테 따져 물은

적도 없고, 내 형제들이 그렇게 많지만 단 한번도 "같이 살면 안돼?"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김동숙 선생님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공부하던 시기에 알게된 지인분이 운영하는 카페~

와플 한덩이를 추가로 주셔서 하나씩 야무지게 먹을 수 있었다~>

 

그 회사에서 계속 일하셨던 건가요?

아니요.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이직을 해야 했어요. 근데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제가 내성적

이다 보니 회사 생활이 그렇게 좋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친구가 일하는 소규모 공장에 같이 다니게

됐어요. 거기서 얘네 아빠를 만났어요.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가 눈이 높다보니까(웃음) 근데 얘네

아빠가 일을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사귀게 됐고 애들을 낳게 됐어요. 제가

봤을 때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은 제가 날씬하고 예뻤을 때만 기억했던 것 같아요. 자기 자식을 낳고

몸이 붓고 살찐 것에 대해서 '건강이 나빠졌구나, 치료해 줘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둘째를

가졌을 때부터 바람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둘째 백일 즈음에 이혼 얘기를 처음 꺼냈는데, 

실제 이혼한 건 둘째가 7살 때예요. 그 사람이 큰 죄를 졌거든요. 그 시기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참 멍청하게 살았구나, 다 받아주고 다 이해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구나. 결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다 따져 물었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에

너무 안타까웠어요.

 

양육비 청구 소송을 진행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정리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게 참 그 법이나 공무원들을 저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애아빠가 7년 동안 양육비 이행을 하지

않아서 청구 소송을 냈어요. 그런데 7년간의 양육비를 계산하는 과정이 제 생각에는 참 애매모호

하더라고요. 자기네들이 생각할 때는 조금이라도 받아주면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저는 계산을 하려면 똑바로 하고 안 하려면 안 할 것이지 왜 이렇게 할까 좀 의아했어요.

 

어쨌든 승소해서 7년치의 양육비를 다달이 받고 있어요. 적은 돈이지만 2~3달 안 내게 되면 압류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그건 괜찮은 방법인 것 같더라고요. 근데 제가 소송을 건 7년간의 양육비만

나눠서 지급하고 있고 그 이후로 발생한 양육비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어요. 지금도 못 받은 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지만, 하여튼 이혼하고 사는 건 행복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좋으셨나요?

가장 좋았던 건 시댁 신경 안 쓰고 비위 안 맞춰도 되는 것 그리고 돈이 모아지더라고요. 단돈

10만원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애아빠가 가게도 가지고 있었는데 생활비는 한

푼도 보태지 않았어요. 거기다가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면 몇백만원씩 빌려 가기도 했고요.

 

<비누공예 전문가인 김동숙쌤이 강사가 되어 진행된 비누워크숍!>

 

민우회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이혼할 즈음에 민우회의 법률 자문을 받았어요. 그 사람이 이혼을 안 해준다고 해서 제가 소송을

걸었거든요. 당시 한부모 사업을 총괄하던 권명애 선생님의 소개로 민우회를 알게 됐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권명애 선생님이 참 많이 노력해주셨고, 힘든 시기에 많이 품어주셨어요. 그때부터

회원가입도 하고 활동도 시작했어요. 당시 한부모사업 중에 요리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약식이라고

하죠? 건강에 좋은 음식 요리법을 매주 토요일마다 배우는 거였어요. 매주 주말마다 가야했는데도

엄청 재밌었어요. 그때 배웠던 연잎밥이나 함박스테이크 같은 건 아이들이랑 지인들에게도 엄청

해줬어요. 그리고 당시 한부모들이 다같이 김치를 담가서 나눠 먹고, 팔기도 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 참여도 하고 그랬죠. 민후회 일일밥집에서 요리했던 것도 생각이 나네요. 그때 제가 취나물 밥

을 했는데 죽밥이 됐지만(웃음) 당시에는 그렇게 활동을 많이 했어요. 이후에는 좀 바빠지면서 예전

만큼은 못하지만 꾸준히 민우회와 만나고 있어요.

 

당시 활동을 하면서 요리 자격증도 따셨다고요.

네.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어요. 제가 은근히 자격증이 많아요(웃음) 저는 사람이 배우면 성과를

따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울 때 딱 보면 '조금 더하면 자격증 딸 수 있겠는데?'생각이 들어요. 

한번 배우기 시작한 건 파고들어서 자격증을 따는게 깔끔하다고 생각하고, 그게 성취라고 생각

해요(웃음)

 

민우회에서 활동가로 오래 일한 슈렉과는 민우회에서 알게 된건가요?

아니요. 제가 민우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슈렉과는 알고 지냈어요. 지금은 단짝 친구예요. 이혼

하려던 시기에 권명애 쌤과 민우회를 소개해 준 것도 슈렉이고요. 슈렉과는 평소에도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슈렉이 민우회 일하면서부터 정말 생각이 많이 바뀌더라고요. 페미니즘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면서 저한테도 많이 전해줬어요. 그러면서 저도 많이는 아니지만 민우회 강연에 참석

하기도 하고, 어렴풋이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요. (슈렉과의 대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는 무엇인가요?) 성소수자에 대해서 슈렉이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이전에 알던 것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요. 그리고 개인의 영역이고 다른 이가 관여할 부분도 아니라고요.

성소수자에 대해 그 당시에는 사실 잘 모르고, 좀 안 좋게 생각한것도 있었거든요. 근데 맞는 말이

더라고요. 슈렉에게 얘기를 듣고 보니 우리 딸내미 중학교에 레즈비언 커플이 있다는게 들리더라

고요. 딸내미가 얘기해주는 걸 들으면서 성정체성은 어렸을 적부터 확고한 거고, 성정체성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가 많이 발전했구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요.

 

말씀하셨던것처럼 군포여성민우회에서 한부모 자조모임을 오랫동안 하고 있잖아요. 슈렉이 쓴

글에서도 한부모 가정한테 보내는 차별적 시선이 여전히 있고, 한부모 가정 당사자들도 그런 

시선 속에 살다보면 스스로도 결함 있는 가족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조모임을 통해 이런 차별적 시선은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있는 지지그룹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였고요.

그런 것 때문에 스스로 한부모 가정인 것을 오픈하지 않는 친구들도 많아요. 저는 평소에 별로 

못 느끼다가 아이 학교 방과 후 선생님에게 크게 모욕감을 느꼈던 적이 있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가 와서는 애가 안하무인이라느니, 생각이 없다느니, 아이 흉을 보는 거예요. 계속 듣다듣다 

보니 '이 사람이 다른 부모들에게도 이럴까? 내가 아이를 혼자 키우니까 이렇게 말하는 걸까?' 생각

이 들더라고요. 아이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직접 묻기도 전에 저에게 연락하기보다는, 아이와

한번 얘기해보라고 했는데 제 말을 제대로 듣지 않더라고요.

 

또 한번은 같은 선생님이 연락이 와서는 자녀분이 참여하고 싶은 체험학습이 있는데 어머님이 

시간이 안돼서 못한다는 거예요. 저는 아이들 말을 존중하는 편인데, 아이가 하고 싶다면 저에게

말했을 거고 그럼 저도 고려해봤을 거라고 답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웬걸, 선생님이 제가 

참여를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그런 얘기를 한 거였더라고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하자) 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저는 한부모 가족을 결함있는 것처럼 보고, 한부모가족의 자녀를 문제아로 보는 시선이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속상했어요. 가정폭력이 매우 흔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한부모 가족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은 이혼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이혼한 건 옳은 선택이고,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 가족의 '내용'이 어떤 지를 더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자녀들을 양육할 때, 물론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대한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려고

했어요. 근데 그런 노력들과 상관없이 '정상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가정교육을 잘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화가 나고요. 부모가 두 명이더라도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부모 

한 명이 독단적으로 명령하는 경우를 숱하게 봤거든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부모 가정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경제적으로도 

여성가장이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구조가 있고, 차별적인 문화도 있고요. 그러니까 국가가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잘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모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국가가 양육비 지급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의식을 갖고 살펴야 하고요.

이것을 위해 민우회와 함께 저도 노력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