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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페미니스트와 동네산책 - 뜬눈편
군포여성민우회 조회수:1333
2021-09-17 23:10:24

 

회원과 함께~ 동네 한바퀴!

<페미니스트와 동네산책>은 매달 1회씩 릴레이로 연재됩니다.

 

9월의 주인공은 바로 군포여성민우회 18년차 활동가이자, 

명리 마스터 뜬눈

 

<뜬눈과의 인터뷰는 9월의 첫날 퇴근길에서 이루어졌다

매일 저녁 생협에 들르는 뜬눈은 이날 말린 꼴두기와 간단한 야채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뜬눈, 무려 18년차 회원이에요. 민우회와의 ‘역사적 첫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민우회를 처음 알게 된건 2002년도에요. 민우회생협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민우회생협에 가입하게 되면 자동으로 민우회에 준회원이 되었어요. 그래서 군포여성민우회에서

각종 회원활동을 안내하는 문자를 받게 된거에요. 처음 참여한 건 4회기로 진행되는 민주시민교육

이었어요.‘아 이런 활동을 하는 곳이 가까이 있었구나’ 해서 회원가입을 자발적으로 했어요.

그때부터 회원소모임에 들어갔어요. 근데 제가 생협운동에 대해 따로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생협 생활재를 이용하면서 생협이 추구하는 가치에 크게 공감하게 되면서 소모임에서 생협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한거예요. 그랬더니 민우회 대표님께서 생협활동가로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셨어요. 민우회 회원가입한지 6개월만인 2003년부터 활동가로 민우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생협활동가로서 생태강의를 진행하고 당시 민우회 지부마다 있었던 '작은가게'를 운영했던 뜬눈>

 

생협은 어떻게 이용하게 되신 거에요?

그때 아이 둘이 천식으로 정말 심하게 아팠거든요. 아직 갓난쟁이인 아이들이 이틀에 한번씩 병원에 가고,

흡입기하고, 그런 생활이 3년이 넘게 이어졌는데 문제는 병원에 가도 낫질 않는다는 거예요.

너무 막막했어요. 이게 왜 이럴까 고민하면서 이유를 찾던 중 천식이 환경병이라는 것을 알게 된거죠.

그러면서 생협에도 가입하고 환경에도 굉장히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저를 포함한 식구들의 일상이

변화되니 아이들이 약도 먹지 않게 되고, 건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이 과정에서 모성주의하고

연결되어 비판 받을 수도 있지만, 돌봄노동을 전담하고 있는 입장에서 아이들이 아팠던 것은

엄마인 저의 책임인 것 같아 고통스러웠고 공부해보니 시장이 건강한 식품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었어요.

소비자인 개인은 힘이 없구나 너무나 억울했죠. 이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우리 아이를 병들게 했구나. 너무 불평등하다. 분노했죠. 그 분노가 생협운동을 하게 된 힘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건 단지 제 개인의 경험이 아니었어요. 당시에 저와 같은 어린 아이를 둔 엄마를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제 아이처럼 환경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고민상담을

많이 해주게 됐고, 실제로 좋아지는 사례들도 늘어나면서 생협 홈페이지에 건강코너를 하나 운영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내 주위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이렇게나 많고, 이런 일들은 앞으로도 너무

많이 일어날 것인데 여기에 대해 점점 더 분노하게 된거죠. 제가 그때 생각했던 것은 우리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지켜내지 않으면 모두 다 피해를 본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당시에 생협 조합원을

한명이라도 더 가입시키기 위해 굉장히 주저함이 없었어요(웃음) 그리고 누군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도 않았고요. 

 

생협운동의 어떤 점이 뜬눈에게 중요하고 의미있게 다가온 건가요?

생협 공간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대중 여성들을 많이 만났어요. 이런 만남이 계속되면서 생각이

변화하게 됐어요. 학생시절 반독재 투쟁의 방식인 단일의제로 싸우고, 그것이 관철되면 세상이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일상에서 겪는 불평등은 여전했고 그래서 너무 막막한 거예요.

그러면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는데 그거에 대해 같이 싸울 수 있는,

나와 생활을 함께하는 내 옆의 이웃들이 많았던 거예요. 그러면서 나의 삶의 주거지에서, 내 생활의

이슈를 가지고, 동료들과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것. 이런 활동이 중요하다는 게 머리로가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체험을 한 거죠. 당시에는 마을 단지별로 생협조합원 모임이 있었어요. 그런 모임에서

생태 문제를 토론하고 먹거리 관련해서 서로 의견 나누고 그런 모임을 지속하면서 꼭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낼 수는 없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고 그런 게 좋았어요.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개인으로 있었으면 굉장히 외로웠겠다. 이렇게 사회적인

연결감각으로 나의 일상을 지켜낼 수 있겠다 이런 것들이 되게 위안이 됐어요.

이 난리를 나 혼자 겪지 않고 함께 겪어낼 수 있어서 내심 안심이 되었고요. 

 

 

<다국적 기업에 대응하는 생협의 운동 '우리씨앗 살리기'는 지금까지 뜬눈이

생협을 이용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생협활동에서 뜬눈이 중점적으로 했던 활동이 어떤 것이고, 지금은 어떻게 정리되었나요?

당시에는 제가 하던 운동을 스스로 생태여성주의라고 명명하지는 못했는데 이후 내 활동을 반추하면서

아 이런 활동이 에코페미니즘에 해당되겠구나라고 정리할 수 있었어요. 페미니즘은 모두가 평등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래서 차별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게 되는 거잖아요. 근데 당시 내가 생태운동을 했던

배경에는 내가 먹거리에서 굉장히 차별받고 있다는 강한 분노가 있었거든요. 몸이 겪는 차별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라고 했을 때 자본이 이윤을 더 많이 창출하기 위해서 건강하지 않은 먹거리를 대량생산하고

있던 거예요. 그러면서 이것이 우리씨앗 살리기 운동으로 이어졌어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자들을

총합해 보면 90%이상이 아시아에 있었대요. 그런데 그것에 대부분을 다국적 기업이 가져가서 특허를

내버린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씨앗을 심으려면 다국적 기업에 로열티를 내야 하는 방식이 된거죠.

외세자본에 의해서 차별을 받게 된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변화시킬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냐면

우리 종자를 계속 지켜내면 되는 거예요. 씨앗을 받아내서 파종하는 걸 계속 반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면 되는 거예요. 종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산자가 계속 생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소비가

되어야 하니까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결되어서 재생산할 수 있는 순환을 만드는 것. 제가 지금까지

생협을 이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돌이켜보면 저는 저의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분노하는 것 같아요.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자기 결정권을 넓혀나가는 끊임없는 과정이잖아요. 그게 제한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컸던 것 같아요. 크게 선동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운동했고

지치지도 않았어요.

 

 

<'낙태죄' 폐지 시위 현장,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는 것이

반성폭력활동가로서 뜬눈의 주요한 질문이다> 

 

2016년 말에 상담소로 활동공간을 옮기셨다고 들었어요. 그전에는 계속 생협활동과 민우회사무국에서

활동을 해오셨던 거잖아요. 직접적인 피해자지원활동은 이전과는 또다른 경험이셨다고요.  

성폭력 같은 경우 사실상 여성의 차별이 극명하게 보여지는 현장이잖아요. 제가 상담소에 와서 떠오른

질문이 내가 생협운동을 하면서 들었던 질문과 겹쳐졌어요. 생협활동하면서 ‘내가 과연 선택할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이렇게 좁단 말이야?’이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근데 성폭력상담소에 와서도

여성이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이 굉장히 협소한 것에 대해 분노감이 일었고 연결이 됐어요.

 

저는 성폭력상담소의 활동이 단순히 피해자 개인에 대한 '상담서비스'나 '복지혜택'이 아니라

성차별을 드러내고, 사회변화를 위한 것으로서 ‘운동’이라는 것이 되게 인상깊었어요.

저는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피해자가 본인이 겪은 피해를 자기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가고 피해의 맥락을 이해하는 순간이 정말 의미있었어요. 피해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성을 알아가면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해나가요. 그리고 이것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서로 함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안에 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을 계속

목격하게 되는 거죠. 피해자상담할 때 제가 ‘이렇게 하세요’ 해서 되는게 아니거든요. 이 분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진전된 해결점을 가지고 와요.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같이 만들어가는 거거든요.

자기문제를 구조화시키고 문제해결의 주체임을 인식하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평등운동에 함께

동참하겠다고 하면서 회원가입도 하고 그럴 때는 동료가 생겼다는 생각에 너무 좋았어요.

 

 

<민우회 지역자치위 동료들과 함께 성평등 자치활동 회의 중~>

 

뜬눈은 지역자치활동에도 열정적이시잖아요. 지역여성운동가로서 지방자치활동에 주목해온

뜬눈만의 이유가 있을까요?

음, 나는 늘 혼자를 꿈꿔요. 조용한 삶을 꿈꾸지만 그 보다 더 강렬하게 함께를 꿈꾸는 나를 발견해요.

혼자 있기와  함께하기는 묘하게 분리된 게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이란 늘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변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게 돼요. 그러면서 지역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곳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요. 나의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곳에서 나는 늘 새로운 걸 꿈꿔요.

뭔가 신나는 일, 사물에 대한 감각이 아름다움과 만날 때 희열을 꿈꾼단 말이에요.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롭게, 단절되어 있지 않고 어떤 주제로 만나고 각자 흩어질 수도 있는 관계, 정말 편하게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경쟁사회 속에서 힘든데 민우회는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곳이잖아요.  

그리고 보통 사회적 통념은 성공해야 하고 일직선으로 성장해야 하는 데 그런 것이 아니라

‘후퇴해도 좋아’ 이런 말을 나눌 수 있는 곳이 지역이고 이런 이야기를 누구의 강요도 아닌

자발적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나의 욕망만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서로 맞추어가는 거잖아요.

이것을 개인과 지역정치라는 구조에서 보면 너무 일방적으로 행정이 가져가고 있단 말이지

성장주의, 개발주의로 이걸 가져가는게 너무 싫은거에요. 어떤 완벽한 도식이 있는 거지 그게 싫어요.

주민의 결정으로 성장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 성장안해도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좀 물어보라는 거죠.

근데 주민들이 다 성장하고 싶다는데 어떡하지 (웃음) 하여튼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요.

없는 게 아니거든요. 근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마이크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마이크를 주고 협상하자는 거에요. 내가 생각하는게 꼭 훌륭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성숙하게 토론하면서

함께 만들어가고,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다는 거에요.

 

 

<민우회 회원행사 중 하나로 타로 배우기!>

 

뜬눈의 이러쿵저러쿵 코너가 있잖아요. 2012년도에 만들어져서 2020년까지도 포스팅이 되어 있던데

이 코너를 시작하면서남긴 말이 되게 귀여웠어요. 뜬눈이 엉뚱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그 당시 다른

활동가들이 아예 자리를 따로 마련해줬다고 그러면서 앞으로 여기서 도시에서 돈들이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도움을 주고 싶다고 쓰셨어요.

재밌게 했어요. 시작할 때는 내가 어려움 속에서 겪었던 노하우를 나누면서 정말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인간중심이 아니라 자본중심인 사회에서 정말 우리가 알아야할 것들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팁을

알려줘야겠다 그런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굉장히 개인사로 빠졌죠(웃음)

저의 기질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굉장히 만족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내가 생협운동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건강상담을 되게 많이 해줬다고 했잖아요. 이게 명리와도 연결되는데 하늘이 부여한

천직이라는 게 있다고 해요. 이게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일로서 의사, 검사, 상담사 같은 직업을 말하는데

명리적으로 볼 때 제 안에 상담사의 기질이 좀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인들과 명리로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의 기질을 파악하여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특징을 부각시켜

설명해요.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또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명리도 막 공부하고, 애니어그램이나 타로

같은 거도 혼자 파고 그랬던 것 같아요.

 

 

 
<'이러쿵저러쿵' 코너는 생활 공간에서 발견한

멋진 장면을 뜬눈이 직접 찍어올리고 이에 대한 짧은 단상이 덧붙여진다. >

 

문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문학에 꿈이 있으셨던 건가요?

문학도였죠. 근데 글쓰는 능력은 없는 것 같아 포기했어요. 단지 이후에 명리를 공부하면서 아름다움을

잘 포착한다는 면에서 예술성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근데 제가 느끼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산을 가다가 어떤 돌멩이를 보고 감동한다던가 이런 거예요.

이런 부분은 저희 부모님의 영향인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어떤 분이시냐면 어렸을때부터 기독교적인

세례를 받으신 분이었어요. 그래서 당시 기독교의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계셨어요. 그리고 소지주의

자녀였기 때문에 문화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희 집에

딸 많고 아들이 하나였는데 성차별은 심하지는 않았어요. 차별감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문화적인 것에도 굉장히 열려있었어요. 그때 그 시골에서 내가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은거야

그랬더니 엄마가 바로 바이올린을 사주셨다니까요. 그런 풍토속에서 자랐어요.

대학교때 함께 살았던 저희 남동생은 어릴 때부터 화가의 재능이 두드러졌고 대학에서도 미술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남동생하고는 늘 예술작품에 대해 얘기했어요. 어떤 작품을 감상한다기보다

비디오를 보다가도 한 장면에 예술성을 포착해서 서로 막 얘기하는 거야 그러면서 난 큐레이터가 되볼까

한때 생각하기도 했어요.

 

직업적으로 여성인권운동을 거의 20년간 해오신거잖아요. 뜬눈에게 페미니즘운동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활동이었던 걸까요?  

음, 나는 사람들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 좋았어요. 그럴 때 희열을 느껴요. 그 변화가

꼭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민우회라는 공간안에서 함께 얘기하고 신뢰를 기반으로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게 회원들은 사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여기에 와서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가 조금이라도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 환호하고 진정으로 좋아하고 이런 게

너무 경이롭잖아요. 나는 밥 안 먹어도 배불렀던 것 같아.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몰라(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