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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페미니스트와 동네산책 -신환규편
군포여성민우회 조회수:223
2021-07-16 10:27:42

 

<신환규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집 뒤편 공원에서 이루어졌다. 출근길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는

멋진 산책길을 걸으며 해가 뉘엿뉘엿질때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신환규 선생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제가 86학번이에요. 86년, 87년 그때는 한참 학생운동이 크게 있었던 시기잖아요.

저도 학생운동을 좀 했었거든요. 따로 학생회를 하거나, 동아리를 했던 건 아니고 대의원으로서 역할을

했어요. 저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이 말이 맞는 말이야, 그 판단이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면서 딱 선

이스에요. 그렇기 때문에 선배가 조직해서 어떤 공간에 소속되어서 활동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협의체 정도에서 활동하고, 부산에 그때는 시내 곳곳에서 거리투쟁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 속으로 바로 들어가는 거였죠.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아버지가 워낙 들고 나는 걸 관리하는

분이셨어요. 가방도 조사하고, 집에 오는 시간 단속하고 그랬죠. 제가 데모할까봐 학교도 못 가게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막 하이힐 신고 정장 치마 같은 거 입고 등교해서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고(?)

그냥 데모하는 거죠. 신발 다 벗겨져서 오고 집에는 넘어졌다 거짓말하고(웃음) 그래서 학생운동했던

사람들하고는 또다른 결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맥락이 민우회 활동과도 연결되었죠.

 

그렇게 태어나서 35년 동안 부산에서만 살았어요. 남편하고는 CC인데 아직 머리도 자라지 않은 예비역

복학생이었고, 같이 학생운동하다가 만난 거죠. 졸업하고 바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직장 생활을

계속 했어요. (혹시 어떤 일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보습학원 영어 강사도 하고, 그때 남편 회사에서

관계자 부인 중 희망하는 사람을 콜센터 직원으로 뽑았어요. 거기에서 일을 했죠. 그러다가 남편이

군포로 발령이 난 거예요. 당시 회사는 나를 본사로 발령 내준다고 하는데, 아이들도 아직 어리고

충무로까지 어떻게 출퇴근을 하겠어요. 그래서 그때 전업주부를 처음으로 한거예요. 그래도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시기가 되어서 내 시간이 좀 확보가 되잖아요. 근데 너무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가사노동에

대해서 가치를 두고 열심히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적성에도 안 맞고.

 

그래서 봉사를 하나 하자 해서 아이들 학교 도서관 봉사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시기에 한참

호주제폐지가 이슈가 되던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기도 해서 관련 활동을 하다가

호주제폐지 이슈를 가져가고 있던 민우회를 알게 된 거예요. 부산에서는 이런 활동을 거의 못했어요.

졸업, 결혼, 취업, 육아로 이어지면서 바깥 활동을 거의 못하고 직장, 집, 육아 밖에 없었거든요.

 

그때 민우회 활동하던 선생님들을 다 만나게 된 거죠. '아 이런 데가 있구나' 했어요. 저희 세대에서는

여성주의에 대한 거를 들을 곳이 거의 없었고, 특히 부산은 더욱 없었어요. 대학교 여성학 수업도 없었고,

학생운동 안에서도 여성주의는 얘기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민우회 활동이나 소식지를 접했는데

'아, 나 이런거 불편했구나'를 처음 안 거예요.

 

 

<퇴근 후 둘 다 출출해서 공원 앞 김밥집에 들러 실한 참치김밥을 먹었다~>

 

 

저는 집에서도 3남 1녀 외딸이에요. 오빠 동생들 다 허용되는데 나만 안되는 게 너무 많았던 거죠.

저희 세대의 경상도는 그게 되게 심했거든요. 그러면서 아버지하고 부딪히기도 하고, 엄마하고도 싸우고

그러면서 살았는데그냥 저 개인의 문제인 줄 알았죠.

 

근데 민우회와 함께 하면서 점점 드는 생각이 '아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구나, 구조적 문제가 있었구나'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거든요. 예전에는 가족으로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눈으로 대충 가리고 살았다면

그게 민우회 만나면서 활짝 걷힌 거예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는 게 병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살았거든요. 근데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걸 확실히 스스로 느낀 거예요. 그때부터 민우회에서 

여성주의 공부도 하고 성폭력예방교육 강사 교육도 받고 지역자치활동도 하면서 되게 단단해지기도 하고,

아 내가 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같은 느낌?

 

   

<당시 민우회 활동가 워크숍 사진 속 신환규 선생님

인터뷰 요청을 아주 흔쾌히 수락해주셨는데 그 이유가 실무자의 고충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ㅠㅠ>

 

그러면서 민우회 상근활동을 시작하신 거예요?

네. 이제 2004년부터 민우회 사무국 활동을 시작했는데 막상 가니까 상황이 너무 열악하고(웃음) 

정말 열악했어요. 뭐 활동비를 준다는 데 도대체 여기서 무슨 월급을 줄 수 있지?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때 당시 회원 회비 2~5천원이었고, 활동가가 1~2명도 아닌데 어떻게 준다는 건지. 그래서 막 평생회비도 

받고, 저도 평생회비 내고 그랬죠. 여름에 사무실 너무 더운데 에어컨 없잖아요. 그럼 당시 같이 활동했던

뜬눈이랑 저랑 퇴근할 즈음에는 둘 다 얼굴이 빨갛게 부어있어요. 그럼 또 서로 놀리고 그랬어요.

 

시어머니가 김치랑 반찬 보내주시면 민우회에서 풀어서 같이 먹고, 그렇게 민우회하고 저하고 동화되어

갔던 것 같아요. 저는 자매애라는 것을 한번도 느껴본 적 없었을 거 아니에요. 실제로 집에 자매도 없었고,

학교 졸업하고 바로 아이를 낳고, 직장 생활하다 보니까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는 정도만 관계를 맺어봤지

그 외에는 별로 해본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밑받침을

민우회에서 다 받은 거라고 난 생각해요. 민우회라는 되게 건강한 조직 속에서 평등한 문화를 배우고,

또 관계하는 법을 배운 거예요.

 

활동하시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으셨어요?

일단은 내가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가는 게 정말 좋았고, 그리고 내가 성장하는 게 보이는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의 활동 밑천은 다 민우회에서 쌓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가치기준이 바뀌었거든요.

예전에는 뭔지 모를 불편한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다가 이제는 확실한 내 가치기준을 민우회를 통해서

가지게 된 거잖아요. 어디를 가든 내 논리가 정확하게 서고, 자존이 서는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민우회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민우회를 만난 거는 내 인생의 제2의 탄생이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해요.

 

가치기준이 바뀌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요?

예를 들어서 경상도 쪽은 남아선호 사상이 엄청 강하잖아요. 제사를 지내야 하는 아들이 있어야 된다는

거에 대해 문제제기할 수 있고, 또 아내 역할에 대해서도 내 얘기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시부모에게

우리 친정 부모 욕 먹이지 않게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 남편을 잘 보필해서 일 잘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누구한테 배운게 아니라 부모를 보고 자란 내 세폭 속에 박혀 있는 거죠.

정말 나는 항상 내 세포 속에 가부장이라고 말하는데,  그 가부장들이 민우회 와서 보니까 구석구석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깨지면서 내 가치관이 확고해지는 거죠.

 

그러면서 남편과는 협상을 정말 많이 했어요. 남편은 처음에 민우회 일은 진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 회사에서 급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바로 전화를 했어요. 예를 들면 회의 중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왜 전화를 안받아??? 빨리 동사무소 가서 뭘 좀 떼다 놔, 나 내일 출근하면서 가져가야 해" 이러는 거예요. 

"나 회의 중이야, 일하고 있어" 이래도 민우회 일을 그냥 봉사활동 정도로 생각한다는 게 남편한테

보이는 거죠. 근데 내가 봉사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정한, 내 시간이잖아요.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와 약속한 시간이잖아요. 근데 그거에 대해 인정을 못 받는 게 너무 분했어요.

옛날 같으면 동료들한테 "내가 이만해서 동사무소 좀 갔다올게요" 했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거에 대해서 내가 확신하게 되고, 둘이서 대치상태가 될 수 있는거죠. 한 두어번 집에서 큰소리 딱 내고

그 다음부터 이런 일 없어지더라고요. "내가 돈을 벌든 못 벌든 누군가하고 약속을 하고 있는데

네가 함부로 그거에 대해서 평가하지 마라"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게 된거죠.

 

그리고 제가 민우회 활동을 하니까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가사노동에 대해 업무분장을 좀 했어요.

가사노동에 대해 도와준다는 표현도 어느샌가 너무 불편해지더라고요. "가사노동은 나의 일이야?

이 집은 나만 살아?" 이렇게 되죠. 그래서 "가사노동은 너의 일이기도 하고, 내 일이기도 해.

해준다는 표현 하지 마" 이렇게 하니까 남편이 그 말은 딱 한번에 수용을 하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도와준다는 소리 절대 안해요. 

 

<당시 성폭력예방교육을 진행중인 신환규 선생님>

 

상담소 활동가로도 일하셨다고 들었어요. 성폭력예방교육 강사도 하시고요. 반성폭력 활동 하시면서

신환규선생님은 젠더폭력에 대해 어떻게 스스로 정리하셨나요?

이게 사회적으로 너무 억압이 되어 있다 보니까 피해자를 다시 누군가가 억압하게 되잖아요.

저는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짧은 치마 입고서 왜 그렇게 늦은 시간 돌아다녔어"라고 말하는게

다른 이가 아니라 피해자의 엄마예요. 저는 그게 너무 충격적이었거든요. 그래서 민우회에서

성폭력예방교육 나가잖아요. 저는 이렇게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바꾸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성폭력의 특징이니까 교육을 통해서 조금씩이라도 바꿔내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거예요.

 

저는 피해자 상담하면 부모는 따로 상담했어요. 그러면 "이건 그냥 누군가에게 두드려 맞는 거랑 똑같아요.

폭력이고, 범죄예요." 이런 얘기부터 해줘야 하는 거예요. 이 부모도 그런 소양이 없는 게 아니라

이런 정보를 들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나마 저는 아주 운이 좋게 민우회를 만나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고, 가해자는 분명히 처벌을 받아야 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안 그런 상황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저는 활동할 당시 교육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민우회에서 활발했던 생협활동은 이후 행복중심생협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민우회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 생협제품 시식회!>

 

민우회 활동을 마무리하시면서 바로 행복중심생협 활동을 시작하신 건가요?

바로는 아니었고요. 그때 나도 조금 매너리즘에 빠진 거예요. 왜냐하면 운동하고 있는 부분에 있어서도

계속 반문이 들고. 제가 일정정도 폭풍성장을 했는데, 그럴 때 머물러서 다져줘야 어느 정도 올라갈

힘이 생기잖아요. 그 시기가 왔던 것 같아요. 그때 둘째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기도 했고, 나도 너무

지치니까 좀 쉰다고 들어왔어요. 근데 아들이 사춘기일 때는 떨어져 있어야 되드만?

그걸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뭘 다시 활동을 해볼까 찾던 중에 행복중심생협에서 구인을 해가지고

인터뷰를 갔죠.

 

민우회 경험이 행복중심생협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건가요?

그렇죠. 민우회에서 여성주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환경문제까지도 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생협활동까지 이어진 거예요. 구체적인 경험은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4~5학년 때 갑자기

살이 찌더니 아토피가 눈으로 온 거예요. 그러면서 생협을 확 이용하게 됐는데, 온 가족이 식단을

바꾼 셈이잖아요. 근데 가족들이 살이 빠지고 건강해지는 것을 보게 된거죠. 그리고 민우회에서

생협활동을 하면서 환경운동으로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배우기도 했고. 그러면서 조합원들과 만날 때

이런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선생님 먹는 게 운동이에요. 이 음식을 먹는 게 나 혼자만의 건강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내가 먹어주는 밀로 인해서 우리 땅이 살아나겠죠? 그럼 환경이 좋아지겠죠?"

그러면서 막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계속 생활 속 운동의 의미로 이것을 했던 거예요.

 

지금 신환규 선생님에게 생활 속 운동으로서 생협의 어떤 점이 의미있나요?

저는 사실 식량주권과 환경운동을 크게 생각하고 있어요. 크게 얘기하면 나와 내 아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거는 환경이 깨끗해야 하고, 내 나라에서 나는 거 내가 먹어내지 않으면 해외에서 식량을

가져와야 할 텐데 그럼 식량이 무기화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들으면 굉장히 생활에 밀접한 얘기인데 또 한편으로는 듣지 못한 얘기여서 그런지

막연하게 들리기도 하거든요. 

제가 비산 매장에서 일했던 때가 2009년이었거든요. 근데 그때 전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있어서

8월 내내 비가 내렸어요. 해외 곡물 가격이 폭등하고 밀가루 가격이 몇 배로 뛰었어요.

곡물사료도 거의 수입해오잖아요. 그것도 엄청 비싸게 사오고, 생활재 가격이 마구마구 올랐어요.

근데 생협은 그때에도 거의 모든 품목을 무리 없이 공급하고 가격도 안정적이었거든요.

그래서 저한테는 생협이 큰 우산 같은 느낌이에요. 막 식량주권이 거대담론이기 보다

생협을 이용하는 이유는 저는 그런 것 때문인 것 같아요.

 

주말이면 대형마트에 가서 이만큼씩 장을 봐오고 동네 슈퍼에 잘 안가잖아요. 그럼 동네 조그만

슈퍼들은 다 문을 닫는 거예요. 그러면 급하게 두부 한 모가 필요해도 차를 가지고 나가야 하는 거예요.

그 슈퍼가 계속 유지되어서 내가 덕을 보려면 그 가게가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소비자들이 이용을

해줘야 하는 거죠. 아니면 정말 긴급한 상황이 왔을 때 힘들어지는 거죠. 이런 것처럼 우리가 국산 쌀을

먹지 않고 계속 수입해온다면 어느 농부가 농사를 짓겠어요. 그러면 한국은 이제 수입을 해서 쌀을

먹을 수밖에 없는데 "올해는 흉작이야 3배 가격을 올릴게" 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지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저한테는 생협이고요.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7월 중순, 저녁이 되니 다행히 바람이 선선히 불어와

비교적 쾌적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행복중심생협이 민우회 활동의 하나로서 만들어진 거고 이후에 따로 독립법인화 됐잖아요. 여성운동으로서 

생협활동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민우회에서 생협을 한 것도 대중운동으로서 폭넓게 여성들을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어요.

당시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많다 보니까 가족들의 건강이 큰 관심사일 수 있잖아요. 생각해봐도 농약에 찌든 

것보다는 친환경으로 키워진 못난 오이나 호박이 낫지 않을까 그래서 접점을 찾아 들어간 거예요. 그러면서

환경 공부도 하고, 공동체 공부도 하고, 그렇게 시작을 한거거든요.

 

얘기를 들어보니 대중여성운동의 방법으로 먹거리를 관리하는 전업주부 모델에 주목하신 건데,

앞에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전업주부보다는 맞벌이 부부비율이 더 많고, 또 비혼운동도 활발해지면서

아예 가족제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여성들이 많아졌잖아요. 

지금 그 부분을 고민하는 거예요. 저희가 의미 있게 보는 것은 지금 젊은 여성들은 소비를 가치에

쓰는 사람들이 되게 많다는 거예요. 저희 세대는 '우리 가족이 잘 살려면 아껴 살아야 한다' 이런 것이

미덕이라고 평가받았던 시기인 반면 지금은 자기 가치에 따라 소비하는 문화가 잘 형성돼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하고는 또 다른 토양이 생긴 거예요. 행복중심생협이 여성민우회에서 독립하고 이름도 바꾸었지만,

여성운동이 캐치프레이즈고 중요한 정체성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정체성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지 그 정체성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기반은 만들어져 있는지

깊이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계속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럼 급 마무리로 신환규 선생님에게 현재 민우회는 어떤 의미인지!

내 삶에 부끄럽지 않은 가치를 세우고 가는 데 있어 민우회가 엄청 큰 기반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이 먹고 아주 당당하게 다닐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아요. 제가 지금 갱년기를 겪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 이런 생각 1도 안해봤어요. 내 나이 또래 되니까 주변에 다 갱년기잖아요.

근데 건강이 안 좋아져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자로서 끝났다'이런 통념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왠지 더 자유로워진 것 같고 더 건강해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게 민우회가 나한테 준 선물인 것 같아요. 옛날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집안의

문화 같은 것들이 힘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힘을 민우회가 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