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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예방교육강사팀 워크숍] <선량한차별주의자> 세미나 후기
군포여성민우회 조회수:113
2021-08-11 16:14:18

 

 

지난 8월 9일 월요일 성폭력예방교육 강사팀 워크숍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피서철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으로 모여 내내 열띤 토론이 이어졌답니다~

 

함께 읽은 책은 김지혜 선생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입니다.

언뜻 모순적인 말처럼 보이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그럼에도 '선량'하고자 하는 마음들을 모아 어떻게 변화의 목소리로 연결할 수 있을지

얘기하는 자리였답니다^^

 

 

 

세미나 말미에는 각자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구절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생생한 세미나 현장의 일부를 회원분들과도 공유합니다~

 

[희동이]

"전망이론은 사람들이 손실의 가능성과 이익의 가능성 가운데 손실의 가능성에 더욱 민간하게 반응하는

손실회피편향이 있다고 설명한다.(중략) 기존에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의 이익이 곧 나의 손실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중략) 평등을 총량이 정해진 권리에 대한 경쟁이라고 여긴다면, 누군가의 평등이

나의 불평등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실은 상대가 평등해지면 곧 나도 평등해지는 것이 더 논리적인

추론인데도 말이다."

 

평등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파이싸움'처럼 평등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평등은 총량이 따로 없고 더불어 잘 살자는 이야기이다. 양으로 계산하는 순간 내가 더 많이 가져와야 

하는 것, 누군가에게 빼앗아오고, 빼앗길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이것부터 변화해야 할 것 같다.

 

[이프로]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발표한 <자유론>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의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자로 많이 얘기된다. 그런데 이 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획일적으로 삶의 형태가 굳어지면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져서 다르게

생각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예를 들면 유교적 사회에서 다른 식의 입장을 취하면 '패륜'이니 뭐니 

쉽게 비난받는다. 어떻게 보면 그게 아닐 수도 있는건데. 이런 부분에 대해 짚어주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되더라

 

[웬디] 

장애인에게 하는  ''희망을 가지라'는 말 역시 전제 때문에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희망을 가지라는 건

현재의 삶에 희망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 장애인의 삶에는 당연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더 근본적

으로는 자신의 기분으로 타인의 삶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 모욕적이라고 했다. 설령 장애인이 사회적 조건

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다. 장애인이 희망을 

가져야 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변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말이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삶의

가치를 매기고 강요하는 말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사회적 변화가 있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차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오드리]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그렇기에 불평등에 

관한 대화가 "나는 힘들고 너는 편하다"는 싸움이 되어서는 해결점을 찾기 어렵다. "너와 나를 다르게

힘들게 만드는 이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공통의 주제로 이어져야 한다.

 

차별은 '무슨 차별' '무슨 차별'이렇게 정해져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이 책에서 

'차별은 계속 발견되어야하고 더 발견해야할 때'라며 차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에 대해 

사회적으로 더 많이 얘기될 때 계속 변화하는 거라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그리고 인용한 것처럼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우스개소리로 '삶은 고행이야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딱 맞아'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근데 모두 다 힘들지만 서로 다르게 힘들다는 것,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불평등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강조하고 싶다. 

 

서구 최초의 공공공간은 그리스의 아고라로 기록된다. 아고라는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가 실천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고라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은 성인 남성에 한정되었고, 여성, 아동, 노예는 배제

되었다. 즉 아고라는 "불평등한 자"의 존재를 조건으로 한 평등의 장소였다.

(중략)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이란 이 아고라에 모든 사람이 입장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실현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오늘날 누가 아고라에 입장할 자격을 가지며, 누가 사적영역에

남도록 요구되는가? 성별,장애,나이,성적지향,성별정체성,국적,출신미족 등 개인의 특성들은 아고라에 

입장하기 위한 기표로 작동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이 기표에 따라 입장 여부가 결정된다. 누군가는

그 기표 때문에 입장을 거절당한다. 

 

최근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여자고, 한국인이고, 아시안이고, 비장애인이고,

페미니스트이자 비건이다' 근데 비건지향을 하다보니 비건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많이 들릴 수밖에

없다. '너 비건인건 괜찮은데 눈에 띄지마. 공공장소에서 비건인거 티내지 마' 이런 말이 많더라. 그걸 보고

'공공장소에서 비건의 목소리가 그렇게 컸나? 가만히 있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근데 이 책을

보면서 소수자가 공공공간에 나가는 것, 드러내는 것이 이렇게 힘든거구나 확인하게 됐다. 아고라에 입장권

이 있는 사람들은 아고라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소수자들은 비건이 아닌척, 숨거나 공공장소에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살아야 한다. 사적영역에 배제되도록 우리를 통제하는 말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

 

 

 

[치토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는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목이 정말 마음에 와닿았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차별할 수 있고, 가해한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선량한'사람일 수 있다. 선량한 마음이더라도 질서라는 이름으로, 법이라는 이름으로

'선량'하지 않은 차별적 행동을 정당화시켜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선량한 마음에 기대기보다는 좋은 법,

좋은 문화를 만들어야 평등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뜬눈]

구조적 차별(systemic discrimination)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우리는 때로 의식적

으로 사회적 편견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평소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는 사람이 정장을 

갖춰 입고 구두를 신을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취업면접을 갈 때이다. 나의 스타일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스타일에 맞춘다. 내가 목표로 하는 직장에서 원하는 직원의 상을 분석해서 그 이미지에 부합하려고 노력

한다. 상대의 편견에 맞추려는 철저히 의도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그 선택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최대한 안전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켄지 요시노는 그의 책 <커버링>에서 '손상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커버링'이라는 말을 통해 그는, 소수자로서 완전한 주류가 되지 못하면서도 동화주의적으로 순응하도록

요구받는 삶의 압박을 이야기한다.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고정관념과 편견이 없는 사회에서 자랐어도 

우리의 관심과 적성이 정말 현재와 같았을까?

 

구조적 차별은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만든다. 차별이 오래 지속될 때 소수자들은 알아서 이 차별적 

구조에 자신을 맞춘다. 노동운동의 중요한 구호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관철되고 있지 않지만, 만약 

관철되더라도 성별에 따라 아예 다른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해서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실제 돌봄노동시장에서 여성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런데 '여성의 일'이란 이유로 돌봄노동은 평가절하되고 낮은 임금이 책정된다. 노동시장만을

살펴보아도 아예 종사하는 직업자체가 다르고, 직업선택권이 성별에 따라 분리되는 상황에서 '관심과

적성에 따른 개인의 선택'은 구조적 차별을 지우는 프레임이다. 

 

[도니]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 원치 않게

소수자의 위치에 놓였을 때 그 사실을 부정하며 고통을 감내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중략)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수고로움이나 불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가치와 지향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정말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중략)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행위,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

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려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

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 책의 마무리 부분이다. 조금 길게 인용했지만 읽으면서 작가가 이 책에서 하려는 말이 이거였구나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개개인은 각자도생하며 정말 열심히 산다. 부당한 일도

인내하고, 다음에는 차별받지 않기 위해 '능력'을 키우느라 늘 바쁘다. 변화는 엄청 멀리 있고, 지금 당장

이 부당함을 인내하는 것은 늘 해왔던, 훈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근데 훈련의 내용을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바꾸면 생각만해도 덜 불안할 것 같고, 하고 싶은 말도 더 많아질 것 같다. 그러니까 '예민하게

사는 것 피곤하지 않아?'라는 얘기보다는, 지금 내가 이 차별을 인내하느라 어떤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완전 인상깊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