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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제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군포여성민우회 조회수:493 182.214.100.107
2022-09-16 18:14:25

2022년 9월 14일 저녁 9시 서울 신당역 화장실에서 20대 여성 역무원이 저녁 순찰을 돌던 중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로, 2019년 피해자가 사적인 만남을 거부하자 만나달라며, 나에게 (불법촬영) 영상이 있다며, 협박과 함께 피해자를 3년 동안 스토킹 해왔던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습니다. 피해자는 해당 재판의 1심 선고일(9월 15일)을 하루 앞두고 가해자의 흉기에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피해자는 2021년 10월 7일 가해자를 성폭력 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촬영물 등 이용강요)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경찰은 가해자를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습니다.

 

스토킹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가해자는 합의를 종용하는 문자를 보내고, 가해자의 부모가 합의를 해달라며 피해자를 찾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더는 찾아오지 말라는 의사를 표하면 잠시 연락을 하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 또 접촉을 시도하는 행태를 반복했습니다. 이에 따라 피해자는 올해 1월 27일 가해자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에 재차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최근까지 별도의 보호 조치를 받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고소 직후인 지난해 10월 한 달여간 신변 보호조치를 취했었고, ‘피해자의 의사가 없어서 조치를 연장하지 않았다’며 별도의 보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스토킹과 불법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으로 고통 받던 피해자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 신변에 대한 보호를 요구했지만 범죄 재판을 하루 앞두고 무참히 자신의 직장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올해는 한 여성이 강남역 인근 상가 화장실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6주기입니다. 이 사건은 범죄의 구체적인 결은 다르지만, 모두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이 주요 현상인 여성 혐오 범죄 사건입니다.

 

오늘은 여전히 만연한 여성혐오 범죄와 취약한 여성 안전 실태를 여실히 직면하는 날입니다.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죽은 일을 유별난 범죄자의 살인 사건으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살인 사건은 꾸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현상)와 관련한 정부의 공식 집계가 없어 실태 파악이 아직도 요원합니다. 비슷한 범죄를 막으려면 페미사이드에 관한 정확한 통계를 토대로 정확하게 진단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성가족부 여성폭력 관련 실태조사에는 페미사이드 혹은 여성혐오와 관련한 살해 통계가 없습니다. 3년 주기로 발표하는 여가부 성폭력‧성희롱‧성매매‧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도 페미사이드 피해 현황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수사기관도 ‘여성혐오’가 동기인 살해 사건은 따로 집계하지 않습니다. 2020년 경찰청 범죄통계는 살인 동기를 생활비 마련, 보복, 가정불화, 우발 등 16가지로 분류했는데, 그 중 ‘혐오’ 혹은 ‘여성혐오’ 항목은 없습니다. 대검찰청의 2021 범죄분석에 기재된 살인 동기 20개 항목 중에도 혐오 관련 항목은 없습니다. 정부의 공식 통계가 없다보니 민간부문이 여성 피해 살인사건 통계를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언론보도를 분석한 이 통계로는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전모를 알 수 없습니다. 통계는 사회적 활동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기초 단계이며, 혐오범죄 통계를 통해 왜 이런 범죄가 나타났는지 살피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사회 구조개혁, 사회 통합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스토킹 방지 및 처벌 관련법들이 국회에 계류하고 있는 동안 또 반복된 죽음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포스트잇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잠재적 피해자로서 겪는 두려움과 공포,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성차별적 구조의 변혁을 요구하는 분노와 다짐을 다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살아남은 우리의 생애를 반추하게 하며, 남성중심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회 속에서 ‘평범한 20대 여성’이라는 규범적 생애서사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획득 불가능한 말인지 깨닫고, 낯선 타자의 개별적 죽음이 아니라 성차별적 구조 속에 위치한 ‘여성됨’의 집합적 경험을 느끼게 합니다.

 

또 한 명을 잃은 뼈아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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